크로스 라이선스(cross-license, 흔히 ‘크로스라이센싱’이라고도 쓴다)는 두 회사가 서로의 특허를 쓸 수 있도록 맞교환으로 허락하는 계약이다. 한쪽만 특허 사용료를 내는 일반 라이선스와 달리 양쪽이 서로에게 사용권을 준다. 두 포트폴리오의 가치가 다르면 차액만 한쪽이 현금으로 메운다(밸런싱 페이먼트). 그리고 대개 과거의 침해 주장도 함께 정리한다. 여러 회사가 특허를 한데 모아 제3자에게도 일괄 라이선스하는 ‘특허 풀’과는 다르다 — 크로스 라이선스는 당사자끼리의 맞교환이다.
두 회사가 “5년 전략적 제휴, 특허 크로스 라이선스 체결”이라고 발표하면 헤드라인은 늘 협력·화해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크로스 라이선스라는 계약의 뿌리를 파보면, 그것은 대개 소송이 있었거나, 소송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글은 특정 제휴가 좋은 뉴스인지 나쁜 뉴스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크로스 라이선스가 무엇을 상쇄하는 거래인지, 그리고 그 값이 재무제표 어디에 숨는지를 개념으로 판다.
크로스 라이선스는 로열티가 아니라 ‘비제소 상태’를 사는 것
일반 라이선스는 “당신 특허를 쓸 테니 로열티를 내겠다”는 일방향 거래다. 크로스 라이선스는 서로가 서로의 특허를 쓰게 열어준다. 여기서 흔한 오해는 “그럼 로열티를 주고받는 계약”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질은 다르다. 크로스 라이선스의 핵심 산출물은 로열티 흐름이 아니라 상호 비제소(non-assertion) 상태다. 즉 “우리는 서로를 특허로 고소하지 않는다”는 상태 자체를 사고판다. 로열티(밸런싱 페이먼트)는 두 포트폴리오의 가치 차액을 맞추는 부수적 항목일 뿐, 계약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제휴 발표에 금액이 공개되지 않는다 — 금액이 계약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상태의 가치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만약 소송을 하면 발생했을 기대 소송비용 = (소송이 벌어질 확률) × (예상 손해배상액 + 법무비용 + 판매금지 리스크). 크로스 라이선스는 양쪽의 이 기댓값을 동시에 0에 가깝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돈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우발 비용을 제거하는 거래다.
왜 경쟁사끼리 특허를 서로 열어주나 — ‘특허 덤불’ 문제
반도체, 특히 HBM처럼 스택·본딩·인터페이스·컨트롤러가 촘촘히 얽힌 영역에서는 한 회사가 자기 제품을 만들면서 남의 특허를 전혀 안 밟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것을 ‘특허 덤불(patent thicket)‘이라 부른다. 서로 조금씩 상대 영토를 밟고 있는 상태다.
이 상태에서 선택지는 둘이다. (1) 서로 고소하며 수년간 법정에서 싸운다 — 그동안 개발 방향은 소송을 피해 우회 설계를 하느라 왜곡된다. (2) 서로 밟는 걸 눈감아 주기로 계약한다 — 크로스 라이선스. 후자는 양쪽 모두 R&D를 소송 리스크에서 해방시킨다. 신기술일수록 특허가 미리 촘촘히 깔려 있어, 크로스 라이선스가 ‘개발을 계속할 권리’의 전제가 된다.
여기서 협상 통화는 현금이 아니라 특허 포트폴리오의 두께와 질이다. 포트폴리오가 강한 쪽이 협상에서 우위를 갖는다. 그래서 기업들이 당장 안 쓸 특허도 방어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 미래의 협상 테이블에 올릴 카드로.
계약서에는 무엇이 들어가나 — 발표문에 안 나오는 다섯 가지
발표문은 “크로스 라이선스 체결” 한 줄이지만, 계약의 실질은 보통 다음 조건에서 갈린다. 발표를 읽을 때 이 중 무엇이 공개됐고 무엇이 비어 있는지를 보면 된다.
- 범위 — 서로의 특허 전부인지, 특정 제품군·기술 분야만인지. 범위가 좁으면 그 밖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소송이 가능하다.
- 기간 — 몇 년짜리인지, 계약 기간 중 새로 출원되는 특허도 포함하는지. 기간이 끝나면 재협상이 다시 협상 국면을 연다.
- 과거 침해의 정리(release) — 계약 전 사용분에 대한 청구를 서로 포기하는지. 진행 중이던 소송의 취하가 여기서 결정된다.
- 밸런싱 페이먼트 — 포트폴리오 차이를 메우는 현금이 있는지, 일시금인지 분할인지. 금액이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양도·지배권 변경 조건 — 한쪽이 인수되거나 특허를 제3자에게 팔 때 라이선스가 유지되는지.
협상에서 누가 유리했는지를 발표만으로 판정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다. 범위·기간·현금 조건이 대부분 비공개라, ‘승패’보다 무엇이 정리됐는지(진행 중 소송의 취하, 과거 침해 청구의 포기)를 공시로 확인하는 편이 정확하다. 서로 청구할 로열티를 상계하는 구조는 특허 로열티 부채는 어떻게 ‘협상 카드’가 되나에서 숫자로 다룬다.
제휴의 효과는 P&L 한 줄이 아니라 ‘우발부채’와 ‘자유도’에 있다
크로스 라이선스가 체결됐다고 매출이 즉시 늘거나 이익 항목이 새로 생기는 것은 대체로 아니다. 그 효과는 세 곳에 흩어져 나타난다.
첫째, 우발부채(소송 충당금·잠재 손해배상)의 감소다. 진행 중이거나 예상되던 소송 리스크가 제거되면 재무제표 주석의 우발 항목과 리스크 공시가 달라진다. 손익계산서보다 주석과 공시에서 먼저 읽힌다.
둘째, 법무·거래 비용의 불확실성 축소다. 수년짜리 소송의 법무비용과 그 변동성이 사라진다.
셋째, R&D 방향의 자유도다. 소송을 피하려 우회 설계하던 제약이 풀리면, 기술 로드맵을 소송이 아니라 성능 기준으로 짤 수 있다. 이것은 숫자로 즉시 안 잡히지만 장기적으로 가장 큰 영향일 수 있다.
SEP와 비표준특허 — 같은 계약, 다른 힘의 균형
같은 ‘크로스 라이선스’라도 특허의 성격에 따라 힘의 균형이 완전히 다르다. 표준필수특허(SEP)는 업계 표준을 구현하려면 반드시 밟아야 하는 특허라 FRAND(공정·합리·비차별) 원칙 아래 라이선스 거절이 어렵고 로열티 산정 기준도 정해져 있다. 반면 비표준특허는 “안 빌려줄 자유”가 있어 협상 지렛대가 훨씬 크다.
그래서 두 기업이 SEP 위주로 얽혔는지, 아니면 핵심 성능을 좌우하는 비표준 특허가 걸려 있는지에 따라, 같은 ‘5년 제휴’라도 실질 의미가 다르다. HBM 같은 신기술은 아직 표준화가 진행 중이라 비표준 특허의 비중이 크고, 그만큼 포트폴리오 대결이 협상을 좌우하기 쉽다.
이 글은 특정 종목이나 ETF를 사라거나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며, 어떤 제휴가 주가에 호재인지 악재인지 예측하지도 않는다. 크로스 라이선스라는 계약이 ‘무엇을 상쇄하는 거래인지’, 그 값이 재무제표와 공시의 어디에 숨는지를 개념으로 설명하는 교육 자료다. 개별 제휴의 실제 영향은 각 기업의 공시·주석·소송 현황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