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HBM을 늘리면 범용 D램이 부족해진다”는 문장은 이제 흔하다. 하지만 이 문장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주장을 뭉뚱그려 놓았다. 하나는 왜 잠식이 일어나는가(웨이퍼 산술), 다른 하나는 왜 그 잠식이 오래 가는가(전환 리드타임)이다. 상록수 관점에서 중요한 건 특정 회사의 이번 증설이 아니라, HBM 사이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두 메커니즘 자체다.
HBM 한 장은 범용 D램 몇 장의 ‘자리’를 먹는가
메모리 팹의 진짜 희소 자원은 ‘비트’가 아니라 웨이퍼 자리 × 공정 시간이다. HBM은 같은 D램 셀에서 출발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이 자원을 더 많이 소모한다.
첫째, 다이 면적이다. HBM용 코어 다이는 용량·설계 오버헤드로 범용 D램보다 크거나, 스택을 위해 여분 구조를 갖는다. 웨이퍼 한 장에서 나오는 ‘판매 가능한 최종 비트’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둘째, 공정 스텝과 후공정이다. HBM은 TSV·스택·본딩 같은 단계를 추가로 거치고, 이 과정에서 수율 손실과 장비 점유 시간이 더 붙는다. 즉 같은 캐파를 HBM에 배정하면 ‘동일 웨이퍼 = 동일 비트’라는 직관이 깨진다.
그래서 흔히 인용되는 “HBM은 같은 비트의 범용 D램보다 웨이퍼를 여러 배 먹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비직관적인 포인트: 증설 발표를 ‘비트’로 환산해 읽으면 범용 D램에서 실제로 빠지는 웨이퍼 자리를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 뉴스가 ‘HBM 몇 % 증설’이라고 말할 때, 그 뒤에 숨은 웨이퍼 소모 배수를 곱해야 범용 쪽 충격의 크기가 보인다.
잠식은 ‘결정’이 아니라 ‘한계 배분’에서 일어난다
메모리 회사는 웨이퍼 한 장을 HBM에 넣을지 범용 D램에 넣을지를 한계 단위로 판단한다. 개념적으로는 ‘HBM 한 장 추가로 얻는 한계 이득’과 ‘그 자리에 범용 D램을 넣었을 때의 한계 이득(=기회비용)‘이 만나는 지점까지 HBM을 늘린다. HBM 쪽 한계 이득이 커지면 교차점이 오른쪽으로 밀리고, 범용 D램에 남는 자리는 줄어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답 가격’이 아니라 교차점이 조건에 따라 옮겨 다닌다는 사실이다. HBM 수요 강도, 웨이퍼 소모 배수, 범용 D램의 기회 가치 — 이 셋이 바뀔 때마다 배분점이 이동한다. 그리고 이 배분은 회사가 ‘한 번 정하고 끝’이 아니라 사이클 내내 다시 계산하는 값이다.
왜 되돌리기가 느린가 — 지속성의 진짜 출처
부족이 ‘장기화’라 불리는 이유는 수요가 아니라 공급 전환의 리드타임에 있다. 세 가지 관성이 겹친다.
- 설비 전환 리드타임: 라인을 HBM 후공정에 맞추거나 늘리는 것도, 다시 범용으로 되돌리는 것도 분기 단위 결정이다. 장비 발주·설치·검증에 시간이 든다.
- 인증(qualification) 게이트: HBM은 고객 인증을 통과해야 팔린다. 한번 인증·양산 램프에 올라탄 캐파를 갑자기 빼기 어렵다. 배정이 ‘점착적’이 된다.
- 자본 배분의 비대칭: 마진이 높은 쪽으로 캐파를 보내는 결정은 빠르지만, 되돌리는 결정은 ‘지금 잘 팔리는 라인을 왜 되돌리나’라는 반대 관성에 부딪힌다.
그래서 수요가 식어도 배분은 즉시 원복되지 않는다. 이 비대칭적 관성이 “부족이 오래 간다”는 문장의 실체다. 부족의 지속성은 미래 수요 예측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설비 배분을 되돌리는 데 드는 시간의 성질에서 나온다.
이 개념을 사이클에서 어떻게 읽나
이 구조를 알면 뉴스 한 줄을 세 개의 질문으로 분해할 수 있다. ① 발표된 HBM 증설을 웨이퍼 소모 배수로 환산하면 범용 D램에서 얼마의 자리가 빠지는가(잠식의 크기). ② 그 배분의 한계 교차점은 어떤 조건에서 다시 움직이는가(방향이 아니라 민감도). ③ 되돌리려면 어떤 리드타임·인증 게이트를 넘어야 하는가(지속성의 길이).
세 질문 모두 ‘가격이 오른다/내린다’가 아니라 ‘공급 자리가 어디로 배정되고, 그 배정이 얼마나 끈적한가’를 재는 질문이다. 이게 상록수 개념으로서 이 주제의 핵심이다 — 사건은 바뀌어도 잠식과 관성의 산술은 사이클마다 반복된다.
이 글은 특정 종목이나 ETF를 사라거나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D램 가격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도 아니다. HBM 증설이 범용 D램 캐파를 왜 잠식하고 그 불균형이 왜 관성으로 남는지를 웨이퍼 산술과 전환 리드타임이라는 구조로 설명하는 교육 자료다. 실제 배분 규모·가격·기업별 선택은 공개된 데이터와 각자의 판단으로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