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단도 16단도 뜬다”는 헤드라인은 단수(stack height)가 자유롭게 늘어나는 다이얼처럼 들리게 한다. 하지만 HBM에서 단수를 올리는 일은 “레고 블록을 하나 더 얹는” 것이 아니다. 얹을 자리가 정해져 있는 상자 안에서 블록을 얇게 깎아 더 많이 우겨 넣는 일에 가깝다. 이 글은 단수 확대라는 반복되는 개념을, 대역폭 숫자 너머의 물리적 트레이드오프로 판다.
단수는 ‘용량’의 축이지 ‘대역폭’의 축이 아니다
먼저 흔한 혼동부터 정리한다. HBM의 성능은 크게 두 축이다. 대역폭은 얼마나 넓은 통로로(채널 폭) 얼마나 빠르게(I/O 속도) 데이터를 흘리느냐로 결정된다. 용량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담느냐이고, 이것이 단수(그리고 개별 다이의 집적도)와 직결된다.
그래서 8단에서 16단으로 간다는 것은 “대역폭 2배”가 아니라 대체로 “용량 확대”에 가깝다. 대역폭은 세대 규격(HBM3, HBM3E, HBM4…)에서 채널·속도가 올라갈 때 함께 뛰는 것이지, 단수를 두 배로 쌓는다고 통로가 두 배 넓어지는 게 아니다. 헤드라인이 “16단”을 성능의 직접 지표처럼 다룰 때, 실제로 늘어나는 것은 주로 한 패키지에 담기는 메모리 용량이다.
진짜 병목: 두께 예산(thickness budget)
여기서부터가 비직관적인 지점이다. HBM 패키지는 GPU/가속기와 함께 하나의 인터포저 위에 올라가고, 그 총 높이는 규격으로 사실상 고정돼 있다. 열 방출을 위한 덮개(리드)와 접촉면의 평탄도 때문에 “그냥 더 높게 쌓으면 되는” 자유가 없다.
총 높이가 고정인데 단수를 늘려야 한다 — 그러면 남는 방법은 하나다. 개별 다이를 더 얇게 깎는 것(die thinning). 8단에서 쓰던 다이 두께를 12단, 16단에서는 더 얇게 만들어야 정해진 높이 안에 들어간다. 여기에 단과 단을 잇는 접합층(마이크로범프+언더필)의 두께까지 이 ‘예산’을 나눠 먹는다.
즉 단수 확대의 정체는 “쌓기”가 아니라 “깎기와 나누기”다. 정해진 두께 예산을 더 많은 층이 나눠 갖는 구조이며, 층이 늘수록 각 층에 허용되는 두께는 줄어든다.
얇게 깎으면 무엇이 무너지나 — 수율과 열
다이를 얇게 깎으면 두 가지 벽이 동시에 높아진다.
첫째, 수율이다. 얇은 실리콘은 웨이퍼처럼 휘고(warpage) 미세한 힘에도 깨지기 쉽다. 여러 장을 정밀하게 정렬해 붙이는 적층 공정에서, 한 층이라도 휘거나 크랙이 나면 그 스택 전체가 불량이 된다. 단수가 올라갈수록 “모든 층이 성공해야 완제품”이라는 직렬 조건이 가혹해진다 — 각 층 성공률이 같아도 층이 많아질수록 전체 성공률은 곱해져 빠르게 떨어진다.
둘째, 열이다. 가속기와 붙은 최하단 다이에서 발생·전달된 열은 위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얇고 촘촘하게 쌓인 다이 사이로는 열이 잘 흐르지 않는다. 최상단과 최하단의 온도 차이가 벌어지고, 가장 뜨거운 지점이 전체 동작 속도의 상한을 정하게 된다. 단수는 용량을 주지만, 그 대가로 열 경로를 길고 좁게 만든다.
아래 위젯은 이 트레이드오프의 모양을 보여준다. 단수를 올릴 때 ‘나에게 허용된 다이 두께’와 ‘스택 전체 수율’이 어떻게 반대 방향으로 벌어지는지를 슬라이더로 직접 움직여 보라.
16단은 12단의 ‘조금 더’가 아니라 별개의 문턱일 수 있다
가장 오해하기 쉬운 지점. 단수는 8→12→16으로 선형적으로 어려워지지 않는다. 특정 단수를 넘어서면 기존 접합 방식으로는 두께 예산도 발열도 감당이 안 돼, 공정 자체를 바꿔야 하는 계단식 문턱이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하이브리드 본딩이다. 기존 마이크로범프 방식은 단마다 범프와 언더필이 일정 두께를 차지한다. 단수가 높아지면 이 접합층이 두께 예산을 크게 잠식하므로, 범프를 없애고 다이를 구리-구리로 직접 붙이는 하이브리드 본딩이 논의된다. 이렇게 하면 층당 두께를 줄이고 열 경로도 개선되지만, 완전히 다른 장비·공정·품질관리를 요구한다.
그래서 “16단”이라는 한 단어 뒤에는 두 가지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기존 방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16단, 다른 하나는 접합 방식을 갈아엎은 16단. 헤드라인의 단수는 같아도, 그 뒤의 공정 문턱을 넘었는지 여부가 난이도와 특성을 가른다. 단수를 볼 때 “몇 단이냐”만큼이나 “어떤 접합으로 만든 몇 단이냐”를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다.
정리 — 단수라는 숫자를 세 겹으로 읽기
단수 뉴스를 만날 때 세 겹으로 나눠 보면 오해가 줄어든다. ① 단수는 주로 용량의 축이지 대역폭의 축이 아니다. ② 총 높이가 고정이라 단수 확대는 다이 씨닝을 강제하고, 이는 수율·열과 맞바꾸는 값이다. ③ 특정 단수 위에서는 접합 방식 전환이라는 계단식 문턱이 있어, 같은 단수라도 만든 방식이 다르면 다른 물건이다.
이 글은 특정 종목이나 ETF를 사라거나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며, 어떤 회사의 단수 로드맵이 앞설지 뒤질지를 예측하지 않는다. 단수라는 지표가 물리적으로 무엇과 맞바꾸는 값인지를 개념으로 설명하는 교육 자료다. 실제 각 세대의 다이 두께·수율·접합 방식은 회사와 제품마다 다르며, 여기서는 반복되는 구조만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