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잡았다’와 ‘못 따라잡았다’가 같은 회사 얘기일 때
같은 추격자를 두고 어떤 기사는 “거의 따라잡았다”고 하고 어떤 기사는 “격차가 여전하다”고 한다. 둘 다 맞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제품 등급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는 하나의 상품이 아니다. 표준 규격에 맞춰 대량 공급되는 범용(commodity) D램과, 특정 고객 시스템에 맞춰 인증을 통과해야 하는 프리미엄(HBM 등) 등급은 진입장벽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 추격자는 이 둘을 동시에 좁히지 않는다. 장벽이 낮은 쪽부터 좁힌다.
그래서 추격을 ‘평균 하나’로 재면 안 된다. 추격은 하나의 전선이 아니라 이중 전선이고, 각 전선의 방어벽 두께가 다르다.
범용의 장벽은 얇고, 프리미엄의 장벽은 층층이다
범용 D램의 사양은 JEDEC 같은 국제 표준으로 규격화돼 있다. 규격이 같으면 원리상 대체 가능에 가깝다. 물론 수율·원가 경쟁이 남지만, “이 제품이 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가”라는 인증 관문 자체가 낮다. 표준품이기 때문이다.
HBM은 다르다. 여기엔 장벽이 여러 겹으로 쌓인다.
- 고객 인증(qualification): 특정 GPU/가속기 제조사의 시스템에 맞춰 통과해야 하고, 이 과정은 리드타임이 길다.
- 적층 수율: 다이를 여러 층 쌓는 구조라 층이 늘수록 수율 확보가 어렵다.
- 첨단 패키징: 하이브리드 본딩 등 후공정 기술이 성능을 좌우한다.
즉 범용은 ‘노드(공정 미세화)‘라는 단일 축에 가깝지만, 프리미엄은 노드 위에 인증·적층·패키징이 겹쳐 있다. 한 축을 따라잡아도 나머지 축이 남는다. 이것이 범용은 좁혀지는데 프리미엄은 격차가 남는 구조적 이유다.
‘격차 N년’은 두 곡선을 뭉갠 평균이다
여기서 흔한 함정이 나온다. “기술 격차 N년”이라는 단일 숫자다.
만약 범용에서 격차가 1년, 프리미엄에서 4년이라면, ‘전체 격차’는 두 값을 제품 비중으로 가중한 평균에 가깝다. 그런데 이 평균은 비중이 바뀌기만 해도 움직인다. 실제 기술이 하나도 안 변해도, 프리미엄 비중이 커지면 ‘평균 격차’는 벌어진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범용 한 등급만 빠르게 좁혀도 평균 격차는 줄어든다 — 정작 프리미엄 전선은 그대로인데도. 그래서 같은 ‘2년’이라도 어느 등급이 좁혀진 결과인가를 묻지 않으면 숫자를 잘못 읽는다.
구성비를 바꾸면 집계값 하나가 어떻게 끌려 움직이는지 직접 움직여 보라. 각 등급의 격차는 그대로 둔 채 비중만 바꿔도 ‘평균 격차’가 달라진다.
구성 변화와 집계 변화는 산술적 관계입니다. 어느 쪽이 원인인지는 이 그림이 말해주지 않습니다.
집계값 하나로는 원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평균 격차가 줄었다’가 실력 향상인지 믹스 변화인지는, 평균을 등급별로 쪼개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왜 한 전선의 승리가 다른 전선으로 번지지 않는가
직관적으로는 “범용을 따라잡았으면 곧 프리미엄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두 전선에 필요한 역량은 부분적으로만 겹친다.
범용 추격의 핵심 역량은 미세공정 노드다. 프리미엄의 핵심 역량은 여기에 더해 적층 수율, 후공정 패키징,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과의 인증 이력이다. 인증은 시간을 사서 압축하기 어렵다 — 실제 시스템에서 검증된 트랙 레코드가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격은 ‘한 번 넘으면 끝나는 벽’이 아니라, 등급마다 별도의 벽이다. 앞 벽을 넘은 속도가 뒤 벽을 넘는 속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 점이 ‘추격’을 단선적으로 상상할 때 가장 자주 틀리는 지점이다.
정리하면 세 가지다. ① 추격은 등급별로 속도가 다르다. ② 장벽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표준 규격 vs 인증·수율·패키징의 다층). ③ ‘격차 N년’이라는 단일 숫자는 이 두 곡선의 가중평균이라 믹스에 흔들린다.
이 글은 특정 기업·종목·ETF를 사라거나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 회사가 언제 격차를 좁힐지 전망하는 글도 아니다. ‘기술 추격’이라는 뉴스를 등급별로 분해해 읽는 개념 틀을 제공하는 교육 자료다. 실제 격차의 크기와 방향은 각자 원자료로 확인해야 한다.